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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의 세계인문여행] 파리 샹젤리제와 광화문광장
  • 글로벌코리아
  • 승인 2020.08.2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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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서 본 개선문.(조성관 작가 제공) ©글로벌코리아)

(서울=글로벌코리아) 조성관 작가 = G7국가의 국가상징도로 중 가장 유명한 곳은 어디일까? 아마도 프랑스 파리 샹젤리제(Champs-Elysées)가 아닐까.

작년에는 샹젤리제 거리에 2000석 규모의 야외영화관이 만들어져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대형스크린은 개선문 앞에 세워졌다. 매년 7월14일 프랑스대혁명 기념일에는 샹젤리제에서 열병식이 열리곤 한다. 샹젤리제의 열병식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개선문을 정점으로 대로 양옆에 가로수들이 도열한 가운데 장병들이 탱크부대와 함께 행진하는 모습은 정말 근사하다. 소설 '개선문'에 등장하는 카페 푸케(Fouquet)가 바로 샹젤리제 대로변에 있다.

샹젤리제를 세계인에게 알린 것은 다니엘 비달이 부른 샹송 '오 샹젤리제'다. 여기서 '오'는 감탄사 '오!'가 아니라 '~에서'라는 뜻의 Au다. 프랑스어를 몰라도 후렴구 "오 샹젤리제" 부분이 나오면 세계인은 합창한다. 이 후렴구를 몇 번만 따라 하다 보면 마음은 어느새 샹젤리제를 경쾌하게 활보한다.

샹젤리제의 보도(步道)는 어지간한 도로보다도 넓다. 노랫말처럼 열 명이 아니라 스무 명이 일렬횡대로 걸어도 충분한 너비다. 1782년, 세계에서 최초로 전용 보도를 설치한 나라답다. 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이던 18세기 말까지 세계 모든 나라의 도로에서는 마차와 사람이 뒤엉켜 다녔다.

샹젤리제 대로에서 본 개선문 전경.(조성관 작가 제공)© 글로벌코리아)

12개 방사성 도로의 이름들

왜 샹젤리제 거리가 유명한가. 개선문 때문이다. 개선문은 1806년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이 건설을 지시했다. 나폴레옹이란 이름만 들어도 유럽 여러 나라가 벌벌 떨 때다. 그러나 정작 나폴레옹은 개선문이 준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 헬레나에서 눈을 감았다.

개선문이 준공된 1836년 이래 프랑스 역사는 승전보다는 패전이 더 많았다. 개선문 아래를 늠름하게 행진하는 군대를 집안에서 창문으로 내려다보겠다는 일념으로 샹젤리제 대로에 아파트를 얻었던 상류층들은 군악대의 승전 팡파르를 거의 듣지 못했다.

개선문은 에펠탑, 몽파르나스 타워와 함께 파리를 조망하는 전망대의 하나다. 개선문 전망대의 높이는 50m. 에펠탑 2층 높이와 비슷하다. 개선문에 올라가려면 벽면의 부조 작품들을 보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프랑스가 승리한 전쟁이다. 1805년 11월, 반(反)나폴레옹동맹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기념하는 부조 작품이 가장 크다. 이 승전을 기억하려 짓기 시작한 게 개선문이다.

개선문 전망대는 입장권만 사면 누구나 올라갈 수 있다. 엘리베이터가 없으니 천천히 걸어 올라가야 한다. 마치 달팽이 몸체로 들어가 나선형을 따라 걷는 기분이다. 개선문 전망대에 서면 샹젤리제 대로, 빅토르 위고 대로를 포함해 12개 대로가 방사형(放射型)으로 뻗어나간다. 10개 대로에는 프랑스에 승리를 안겨준 전쟁 영웅 10명의 이름을 붙였다. 삐뚤빼뚤했던 파리 시가지를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질서를 부여한 사람은 오스망 시장이다.

개선문 아래를 통과하는 것은 프랑스에서 가장 특별한 이벤트다. 프랑스의 영웅들만 통과할 수 있다. 1840년 세인트 헬레나에서 운구된 나폴레옹의 관이 최초로 개선문을 통과했다. 두 번째로 개선문 아래를 통과한 사람은 '레미제라블'의 작가 빅토르 위고(1802~1885)다. 물론 위고는 관 속에 누워서였다. 국장(國葬)으로 치러진 위고 장례식은 두 번 다시 보기 힘든 장관이었다. 개선문 입구에는 위고 장례식 관련 흑백사진 몇 점이 전시 중이다. 위고의 관을 실은 거대한 상여가 막 개선문을 통과 중인 광경도 보인다. 'Victor Hugo'의 이름 철자 'VH'가 상여 전면부에 선명하다. 위고의 관은 그날 샹젤리제 대로를 내려가 콩코드르 광장에서 센 강을 건너 팡테옹에 안장됐다.

 

개선문과 연결된 샤를 드골 역과 샹젤리제의 조지 5세역, 루스벨트 역, 클레망소 역 개념도.(조성관 작가 제공)©글로벌코리아)

루스벨트 역, 아이젠하워 애비뉴…

1944년 8월25일, 파리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던 날 프랑스 망명 정부의 지도자 드골 장군은 개선문 앞에서 출발해 콩코르드 광장까지 행진했다. 그의 뒤를 지도부와 병사들이 뒤따랐다.

필름을 거꾸로 돌려보자. 1940년 파리가 함락되자 프랑스는 런던에 망명정부를 세웠다. 체코슬로바키아 역시 런던에 망명정부를 뒀다. 1940년 5월, 체임벌린 수상 후임으로 구원 등판한 처칠은 처음에는 드골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드골은 서서히 처칠의 믿음을 끌어냈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도 드골을 신뢰하기에 이르렀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은 연합군의 작품이다.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영국의 천재 수학자 앤런 튜링이 U보트의 암호를 풀지 못했으면 2차 세계대전은 1945년에 끝나지 못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도입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어떤 희생을 치르고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프랑스 해방의 영웅들은 드골 장군, 처칠 영국 수상,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 미국 육군참모총장이다. 프랑스는 국가상징거리인 샹젤리제에서 이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기리고 있다. 개선문을 감싸고 있는 원형교차로 이름은 '에투알 샤를 드골'이고, 개선문과 연결된 지하철역은 '드골' 역이다.

'드골' 역에서 출발해 콩코르드 광장을 향해 걷다가 만나는 첫 번째 지하철역은 '조지 5세' 역이다. 왜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여기에? 조지 5세는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와 손잡고 연합국의 승리를 이끈 국왕이었다.

상젤리제에서 두 번째로 만나는 지하철역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역이다. 그 역에서 센 강을 향해 난 도로 이름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애비뉴다.

 

클레망소역 앞 광장에 세워진 드골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이 그랑 팔레. 왼쪽은 처칠 애비뉴, 오른쪽은 아이젠하워 애비뉴.(조성관 작가 제공)

세 번째 역은 '샹젤리제 클레망소' 역이다. 클레망소는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다. 이 지하철역을 나오면 작은 광장이 나타난다. 이 광장에 진정한 프랑스의 영웅이 기다린다. 샤를 드골이다.

파리를 해방시키던 그 뜨거웠던 여름날의 기억을 소환한다. 샹젤리제를 걷던 그 표정, 그 걸음걸이 그대로다. 드골은 지금 콩코르드 광장을 바라보며 걷고 있다. 드골 동상 옆의 거대한 건물은 전시공간인 그랑 팔레. 이 전시장 앞길은 '윈스턴 처칠' 애비뉴. 그랑 팔레 옆길은 '아이젠하워 애비뉴'다.

'윈스턴 처칠' 애비뉴를 따라가다 보면 센강 못미처 왼쪽에 작은 공원이 나온다. 이 공원에 동상이 하나 서 있다. 윈스턴 처칠 동상이다. 지팡이를 짚고 있는 구부정한 노년의 윈스터 처칠. 프랑스는 1·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의 자유를 지켜준 이들을 이렇게 기억한다.

 

샹젤리제 루스벨트역(왼쪽 위)과 클레망소 역 주변의 상세도. 루스벨트 애비뉴, 아이젠하워 애비뉴, 처칠 애비뉴의 이름이 보인다.(조성관 작가 제공)©

대한민국은 자유롭고 평등한 보통 선거에 의해 1948년 건국됐다. 6·25전쟁 초반 부산까지 밀렸다가 UN군의 참전으로 공산주의 침략을 물리쳤다. 그 후 한국은 한미동맹을 연결 고리로 세계 자유민주주의 블록에 편입되면서 번영의 토대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의 국가상징도로는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로 볼 수 있다. 이 구간에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그 어떤 것도 없다. 맥아더의 UN군이 인천에 상륙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공산화됐다. 6·25전쟁 3년 동안 한반도에 피를 뿌린 유엔군은 모두 4만896명. 이중 미군은 3만6492명이다.

광화문광장은 세종의 동상이 들어서면서 광장 분위기가 조선시대의 광장이 됐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한때 서울시는 광화문광장 재조성 사업을 추진한 적이 있다. 조선조 육조거리를 재현하겠다는 게 이 사업의 골자였다. 하긴, 현재 통용되는 지폐의 인물들은 모조리 조선조 인물뿐이다.

서울 광화문은 내게 제2의 고향이다. 광화문 거리를 걸을 때마다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가 오버랩되곤 한다. 그리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1963년 10월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 1주기에 참석해 행한 추도사를 떠올린다.

"…한 나라는 그 나라가 배출하는 인물만이 아니라 그 나라가 기리는 인물, 기억하는 인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 외부 필진의 글은(글로벌코리아)의 편집 빙향과 다를수 있습니다.

 

 

뉴스1 <뉴스커넥트>를 통해 제공받은 컨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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